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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순간을 믿어요

주얼

글. 정윤희 작가  /  사진. 스톤김 작가

지금 도전하는 일이 성공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의심의 순간, 불확실한 순간에도
스스로 믿음을 가지고 선택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주얼)


소설가 주얼(본명 김현엽) 님은 올해 7월 소설집 <당신의 판타지아>를 발표했습니다. 스튜디오D에 입주한 지 한 달 만이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지는 반년만입니다. 이전에 발표했던 작품들이 잔잔하고 서정적인 이야기 위주였다면, 이번 책에 실린 작품들은 극적이고 환상적인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수록작 <키클롭스>에서 현오는 엄마의 장례식 이후,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시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시력을 잃어버린 이유가 장례식 때 너무 많이 울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5년, 현오의 왼쪽 손바닥이 욱신거리더니 손금 부위가 갈라지며 눈동자가 생겼습니다! 다시 시력을 얻은 현오는 새로운 삶과 새로운 사랑에 눈을 뜹니다.
<이상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건>에서 주인공 ‘나’는 길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는 자상한 인물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고양이가 집안으로 들어오더니, 나직한 남자 목소리로 자신을 ‘고양이 372호’라고 소개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는 ‘고양이 1호’가 무분별하게 동물을 해친 대가로 인간세계에 복수하려고 하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말합니다.
일상적인 배경 속에서 자전적인 이야기를 주로 하던 작가님이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운 인물과 상황을 창조한 겁니다. 등장인물들은 때로는 황당한 판타지를 경험하고, 때로는 극한의 상황을 통과합니다.

암담한 현실을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비극에 이르는 인물들도 등장합니다. <경수의 다림질>에서 화자인 ‘나’는 취업 준비 중에 경수를 만나 연인이 되고 동거를 시작합니다. 두 사람의 월세를 합친 덕분에 어두컴컴한 한 칸짜리 방을 탈출해서 좀 더 나은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지요. 널찍한 남향의 베란다 앞에서 경수는 풍족한 햇살을 맞으며 셔츠를 다리는 일을 즐깁니다. 빠듯한 살림에 아직 턴테이블까진 마련하지 못했지만, 언젠가 다림질하며 들으려고 LP를 한 장 두 장 사 모읍니다.
시간이 흘렀고 대기업을 향해 있던 취업의 이상은 멀기만 했고, 두 사람은 각자 적당한 곳으로 직장을 얻었습니다. 연인 관계도 진작 깨졌지만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무미건조한 동거를 지속합니다. 그 사이 회사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던 경수는 회사를 그만두고 배달일을 하다가 그만 사고로 죽습니다.
주얼 작가님은 그전까지는 자신을 닮은 인물들을 소설에 많이 등장시켰는데요, 경수라는 인물은 작가님과는 별개인, 새롭게 창조된 인물입니다. 그런 점에서 작가님이 애정을 쏟은 인물이기도 하지요. 주얼 작가님은 이 작품을 쓰면서 경수가 처한 현실에 깊이 공감되어 때때로 감정이 벅차오르기도 했답니다.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했어요.
이런 상황이 제게 현실 같지 않고 환상적으로 느껴졌어요. 걱정도 많고 고민도 많았어요.
그러한 나의 감정이 환상적이면서도 비극적인 결말로 표현되었던 것 같아요.
(주얼)

하지만 이번 책에서 비극적인 사건만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주얼 작가님은 새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굳은 믿음을 전해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수록작 <순간을 믿어요>에서 주인공 ‘나’는 소설가입니다. 출판 계약 건으로 도쿄에 온 ‘나’는 그전 에든버러 여행에서 우연히 만났던 일본인 ‘유이’와 재회합니다. 유이는 한국문학을 전공하고 한국어에 유창한, 어딘지 신비로운 매력을 지닌 여성입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면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서로 인연을 맺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기적 같은 만남 속에서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요.

“생각해 보면 저에게도 중요한 변화의 순간이 있었어요. 바로 연기를 시작한 순간이요. 전 그때 어떤 의심도 없이 오롯이 연기에 몰입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전 연기를 하는 내내 의심하고 불안해했던 것 같습니다. 저를 믿지 못했고, 제가 마주한 순간들을 믿지 못한 거죠. 만약 언젠가 제 삶을 변화시킬 순간이 다시 찾아온다면 작가님 말씀처럼 그 순간을 의심하지 않고 온전히 믿어보려 합니다. 이제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등장인물 유이의 편지 중에서)

6월 스튜디오D에 입주한 주얼 작가님은 이곳에서 <당신의 판타지아>를 마무리했습니다. 카페와 도서관을 전전했던 이전보다 훨씬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고, 언제든 작가님이 작업하고 싶을 때 작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이곳에서 새로운 작품을 구상 중입니다. 장위동과 석관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소재로 장편 소설을 쓸 계획이랍니다. 계획대로라면 주얼 작가님의 첫 장편 소설집이 될 것입니다.
글을 쓰다가 위로가 필요할 때면 작가님은 종종 지인들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소중한 말들을 꺼내어 봅니다.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자신을 겁 없이 도전하게 만들었던 그 기적 같은 말들을요. 지금 여러분에게도 그 온기와 진심이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일기조차 제대로 써 본 적이 없던 제가 새해엔 글을 한 번 써 볼까 했을 때, 제 친구는 제게 정말 잘 할 것 같다고, 한번 해보라고 말해주었어요.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에만 전념하고 싶다고 했을 때 지인들은 잘 할 수 있다고, 원하는 대로 해보라고 지지해 주었어요. 독립출판하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우리는 할 수 있다고, 계속 가보자고 서로 용기를 북돋아 줘요. 제 소설을 읽는 독자 중 누군가도 무언가를 선택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거예요. 전 그분에게 자신을 믿고 나아가 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주얼)

  • 스튜디오D 입주작가
    주얼

    2020년 1월부터 독립서점 부비프의 글쓰기 모임을 통해 단편소설 창작을 시작하였다. 소설집 <당신의 계절이 지니가면>, <여름의 한가운데>, <달이 뜨는 동쪽, 세상의 끝>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