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하고 유동적인
황아일
글. 정윤희 작가 / 사진. 스톤김 작가
또 한차례의 홍수가 지나가고 있는 여름입니다. 견고할 것만 같았던 세상은 간혹 부서지기도 하지요. 여러분의 삶은 지금 안녕하신가요?
부서지고 있는 것들 중에는 한남동 재개발 구역에 위치한 가옥들도 있어요. 사람들의 삶을 단단하게 에워쌌던 집들이 하루아침에 부서질 수 있다는 건 기이한 일입니다. 20년 전에 재개발이 계획되었다니, 이미 사람들의 삶을 단단하게 에워쌌던 건 아니라고 봐야 할까요? 황아일 작가님은 이곳의 한 주택에서 전시를 진행했습니다. 버림받은 문짝과 창문에 설치작업을 입혔고, 전망이 내다보이는 커다란 베란다 창문은 자홍색 시트지를 발랐습니다. 시트지에는 군데군데 찢긴 구멍을 냈습니다.
최후를 맞기 직전 방문했던 이곳의 창밖 전망은 잊지 못할 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슬람 사원과 교회, 대사관과 난민촌, 부와 빈곤, 극심하게 대비되는 것들이 혼재되어 있는 기묘한 풍경에 작가님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합니다.
황아일 작가님은 독일 유학 생활을 하면서 ‘차이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밖에 없었어요. 관습, 일하는 방식은 말할 것도 없고 사고방식과 언어습관에서까지 그들과 많은 차이를 느꼈습니다. 그동안 견고하다고 믿어왔던 주변의 시스템들이 어딘지 모르게 살짝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죠.
그래서 건축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건축은 우리가 견고하다고 믿는 것 중 하나입니다. 권력이나 시스템, 관습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2012년 <드러내기>라는 작품에서 커다란 벽체를 불안정한 형태로 공간에 세워두었습니다. 원래 벽체 안에는 알루미늄 골조가 들어가 있었는데, 이 골조를 빼내어 비어있는 채로 세워두었죠. 관객들은 그 벽이 비어있는 상태이고, 심지어 전시되고 있는 작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그 벽에 기대곤 했습니다.
우리 삶에서 단단하다고 생각되는 것, 건축, 시스템, 권력, 관념 등에 대해 생각했어요.
우리가 단단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을 유연하게 드러내고,
유연하다고 생각되는 걸 다시 단단하게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황아일)
쉽게 떼어낼 수 있어 철거가 용이한 라텍스 페인트는 황아일 작가님이 즐겨 쓰는 재료입니다. 기존 전시장이 하지 말아야 할 것도 많고, 전시가 끝나면 며칠 안으로 원상복구를 해야 하는 장소의 제약 때문에 처음 접하게 된 재료입니다. 라텍스 페인트는 독일에서 개발된 실내 인테리어용 페인트인데, 라텍스 페인트로 칠한 벽은 얼룩이 져도 물걸레로 닦을 수 있어 관리가 편하다고 합니다.
이것을 쓰다 보니 작가님은 이 재료가 매력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라텍스 페인트의 유연함은 작품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치 작품을 녹아 흐르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습니다. 몇 층짜리 건물 유리창을 통으로 덮어버릴 수도 있고, 작은 액자 안의 평면 작업도 가능하게 합니다. 떼어낸 라텍스 페인트는 접거나 쌓아서 다음 작품의 재료로 재활용될 수 있습니다. 2023년 <검은 직사각형>이라는 작품에서는 하얀 벽 위에 액자 대신 네모난 모양으로 라텍스 페인트를 붙여놨습니다. 그리고 페인트를 조금씩 벗기면서 작품이 매일 변화하는 과정을 선보였죠.
황아일 작가님은 지난 6월, 스튜디오H에 입주하였습니다. 이곳에서 10월에 예정된 개인전을 준비하며 설치 작업들을 미리 실험하고 있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복구’를 주제로 갤러리 공간과 주변 지역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또한 작가님은 스튜디오H에서 그동안 자신이 해왔던 작업들을 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을 만나면 설치미술 작가의 작업도 새로워집니다. 한때 전시장 한쪽을 견고하게 버티고 있던 작품은 전시가 끝나는 즉시 형태를 잃어버리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님의 생각은 새로운 장소로 흘러 또 다른 형태를 지니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과 믿음도 어떠한 형태로든 항상 갱신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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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H 입주작가
황아일서울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 쿤스트아카데미에서 미술 석사학위를 받았다. 일상적인 공간과 사물, 상황, 관계를 일부 변형하거나 조정하여 그 대상을 둘러싼 다층적 의미를 드러내는 시도를 해 오고 있다.
주요 전시로는 《프랙투스 프랙탈》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청주, 2023), 《탠저블 앱센스》 (17717 갤러리, 서울, 2023), 《Abwesen》 (벨트쿤스트찜머, 뒤셀도르프, 2022), 《구름그림자》 (성북예술창작터, 서울, 2021), 《Ida-Gerhardi-Foerderpreis》 (뤼덴샤이드시립갤러리, 뤼덴샤이드, 201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