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밭골 울타리 안의 청년 작가들
배밭골곡괭이
글. 정윤희 작가 / 사진. 스톤김 작가
학교를 졸업하면서 작업실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지원)
국민대학교 건너편 정릉3동은 과거에 배밭골이라 불리던 곳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일군 동네는 당시 딱히 이름도 없어, 배나무가 몇 그루 있다는 이유로 ‘배밭골’이라 불렸지만, 인심만큼은 후했습니다. 배밭골에 위치한 한 공동주택에는 국민대학교 출신 청년 작가들이 사용하고 있는 작업실이 있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학교의 테두리를 벗어난 일곱 명의 친구들은 서로를 의지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월세를 공동으로 부담해 작업실을 얻었습니다.
완성된 작품에 대해 교수님이 뭐라 하실지 더는 알 수 없지만 대신 친구들끼리 서로의 작품에 대해 논평합니다.
서로의 작품을 보고 자극을 받기도 합니다. 한 달에 얼마나 작업실에 나왔나 출석체크도 해줍니다.
‘배밭골곡괭이’는 이들 중 박희수, 이지원 작가님이 결성한 팀입니다.
곡괭이는 수확할 때 쓰는 농기구인데, 지금 우리가 재료를 얻기 위해
하는 행위가 농사지은 걸 수확하는 느낌이어서 배밭골곡괭이라고 이름 지었어요.
(박희수, 이지원)
배밭골곡괭이의 두 작가님은 재료의 준비 단계를 함께 합니다. 두 사람 모두 학교 근처 동네에 관심이 많고 이곳에서 영감을 받아 작업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졸업작품 전시 준비를 위해 기획했던 주제인데 계속 실험해 보고 싶은 것들이 보여 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생활 반경이 많이 겹치는 두 사람은 각자 일상생활을 하며, 혹은 함께 산책을 하며 동네 곳곳에 놓인 사물들을 관찰하고 필요한 건 주워옵니다. 간혹 어둑한 시각에 인적 없는 곳을 다닐 때에도 서로를 의지합니다.
최근에는 주워온 물건을 갈아서 오일을 섞은 다음 직접 물감을 만들고 있습니다. 토분도 갈고, 아스팔트도 갈고, 달걀 껍데기도 갈고, 변기도 갑니다. 우선 망치로 작게 조각낸 다음 커피콩 분쇄기로 갈기도 하고, 분쇄기로 갈리지 않는 건 절구로 직접 갑니다.
물건들이 그렇게 생긴 데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어요.
얼기설기 생긴 것 같아도 나름 단단한 형태를 지니고 있고,
궂은 날씨에도 자신의 영역을 굳게 지키며 서 있어요.
(박희수)
토분, 변기, 아스팔트는 갈아놓으면 모두 갈색을 띠지만 채도는 물건마다 상당히 다르게 나옵니다. 박희수 작가님은 이 물감으로 100호짜리 캔버스 두 개를 나란히 세워놓고 누워있는 냉장고를 그리고 있습니다. 작업실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의 작업입니다. 빈 냉장고는 크고 깊은 화분이 되어 다양한 식물들이 그 안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가만히 놓여있는 사물들이, 의미 없이 떠돌아다니는 말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이지원)
이지원 작가님은 사물에 담긴 이야기들을 수집합니다. 그래서 동네에 놓인 물건들도 충분히 관찰한 다음 가져오는 편이고, 주워온 물건들도 오래 바라보았다가 재료로 사용합니다. 가끔은 김밥집에서 달걀 껍데기를 받고, 슈퍼에서 유통기한 지난 커피 가루를 받습니다. 가게는 작가님의 생활과 밀접하고 그만큼 친숙한 곳입니다. 당근 거래를 통해 물건을 얻기도 합니다. 거래할 때에는 판매자의 아이디, 채팅창으로 거래 과정에서 나눈 대화들을 마음에 잘 새겨둡니다. <일방적대화>라는 설치 작품은 이렇게 모인 사물들 간의 말 없는 대화를 담은 작품입니다.
배밭골곡괭이는 올해 성북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오픈 스튜디오를 진행합니다. 찾아주시는 분들과 소통하며 재료로 쓸 물건들을 받을 예정입니다. 특히 같은 건물에 사시는 분들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작가님들이 이사 오면서 듣기로는, 그전에 살던 부부가 주인 어르신의 딸 부부라고 합니다. 이 건물에는 친족 관계, 사돈 관계로 엮인 세대들이 여럿 살고 있다고 하네요. 작가님들은 그들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는 상상을 조심스레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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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지원
배밭골곡괭이배밭골곡괭이(박희수, 이지원)는 거주지와 작업 공간 주변에 대한 관심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일상생활에서의 지속적인 작업 활동을 위해 재료(폐기물) 자체를 길에서 수집하고 가공하여 미술적 재료로 변환한다. 현재 이들은 폐기물로 만든 재료로 작품을 제작하고 있으며, 2024년 하반기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